DiAlogue 1



딜리네스(Delines)


  • 1.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
  • 2. 선을 지우며 선을 그리기 
  • 3. 없는 이름, 여성형 명사 
  • 4. 매개자 - 돌보는 자 
  • 5. 쌍둥이좌


로쿠스 솔루스


(1) 중간계

조응의 장소, 채널링의 장소, 상태, 현상으로서의 공간,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곳조재영(이하 ‘적색 ’): 중간계는 존재하는 것인가? 나타나는 것인가? 해서, 발견하는 것인가? 창발하는 것인가? 존재의 철학 vs 생성의 철학  / 전시의 미학 vs 방문의 미학

이윤이(이하 ‘청색’): 중간계는 공존하는 것이다. 발견(생성)과 방문(망각)의 동시창발, 꿈꾸는 사이에 잠시 스치듯 본 옆 모습, 전시는 방문과 함께 시작하고 이는 동시창발한다. 방문, 타자, 응시하는 주체를 의식하고 케어하는 전시 방식은?

정령의 흔적, 정령의 통로, 정령의 휴식처, 정령의 이름 ’ 딜리네스’
‘동굴에서 바닥은 대지 그 자체이다……. 동굴에서 서식한다는 것은 대지 위가 아니라 그 안에 사는 것이며……..풍경을 회화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발자취를 대지에 새겨넣듯이 자신들(아니면  선조들 또는 자신들이 변신한 정령들)을 그 안에 그려 넣었다.’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팀 잉골드 p.82)


그렇담, 벽과 천장의 위상은 무엇을 말하나? 가림막, 집(거주지)의 기원, 세우고 가린다는 것, 로쿠스를 그렇게 세우고 가리워진 공간으로 인식한다면, 거대한 외부환경(대지) 위에(속에) 쳐진 한 벽면(건물)을 전제한 다는 것의  의미

주체가 수없이 머문 장소를 방문해 흔적을 읽는다는 것은, 그 주체는 임시적이었고 공동의 것이었고 그 흔적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는 몸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고 음식을 먹으면서 끊임없이 번갈아 세계를 우리 안에 모으고 우리 자신을 세계에 풀어놓는다. 우리가 서식하는 집과 지형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떤 차이가 생겨날까?’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팀 잉골드, p. 82)

‘로쿠스 솔루스 - 외딴곳'의 정의는? 외딴곳에 세계를 모은다는 것, 몸에 외딴곳은? 세계의 외딴곳으로서 로쿠스를 상상해 보는 것.

어떻게 이곳을 ‘외딴 곳’이라 정의하는가? 코너로 몰렸을 때 확장하는 감각은?

middle: ‘중간’이 규정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질문
  • middle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 ‘발견’되는 것?
  • 주로 ‘아이’들이 발견한다. 라스코 동굴벽화가 그렇듯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듯이.
  • 접힌 장소, 열린 포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제주 당문화

지상과 천상의 연결, ‘의지’ 지상의 존재들이 갖는 것

어떤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들어오는가? 
지상에서 인간의 의지, 의례와 의식을 통해 천상 존재의 힘을 ‘탈취’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탈취가 저절로 혹은 그저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고 그 정령을 몸안에 들여오는 구체적이고 엄격한 형식 및 절차(의례와 의식)가 필요한 것. 그 형식의 틀 속에 나의 몸과 의식을 맞추어 내는 것, 그 틀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 강제성, 수련, 수행
!!??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틀을 ‘로쿠스’로 상정하고 ‘마음을 내는 것’을 ‘딜리네스’로 상정하고, 그 ‘나머지 것’들이 전시물이라면


현대 종교와 딜리네스 중간계의 차이?

절대, 주체적 신 vs 애니미즘(다신성)
‘로쿠스 솔루스’라는 중간계는 애니미즘 기반의 장소이다. 애니미즘의 기본 테제는  ‘만물에서 영혼을 본다.’ 모든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물에서 다른 영혼을 같이, 동시에 본다. 관계적 사고, 관계성.(논의필요) 이곳 중간계가 ‘다신관’에 기초한 반면 현대의 종교와 그 장소는 주재자, 유일신 등 하나의 중심이 선제적으로 설정되고, 그 중심이 절대권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권력 중심으로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이 수직적으로 배치되는 구조이다.

애니미즘
  • 만물에서 영혼을 본다.
  • 영혼의 관계성, 관계적 사고

정령의 ‘돌봄’개념 
애니미즘-다신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돌봄’ 또한 주재자, 절대신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굽어 살피는 게 아니라, 만물이 만물을 돌보는 것. 그렇다면 ‘기도’의 개념도 달리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도의 방향이 한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데 이때 서로-개인 안에서도 만물을 동시에 보는 것, 만물의 관계를 고려한 기도. 특정 한 사람만의 안위를 위한 기도는 불가능, ‘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질문들과 맞닿아있음.


  • 이반 일리치에게 신앙은: 신, 삶에 대한 경이로움, 우정, 환대, 겸손과 감사 - 이 세계는 우연이고 유한하다. 기쁘게 누리고 감사하라.
  • 생태 전체주의와 생명 우상화에 대한 경계 To Hell with Life!
  • 낭만주의적 문명 비판의 기만성: 인간의 보편적 탐욕이 환경 파괴의 원인이라는 물타기, 고통과 죽음을 제거하려는 현대 과학과 종교
  • 인간의 거주지(dwelling)인 지구: 인간이 살아감으로써 인식되는 환경 자연과학적 환경이 아닌 인문학적 환경
  • 사마리아인의 일화: 구원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타자를 통한 경이로움의 체험에 있다. 충성과 의무의 범주 밖에서 사랑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ex) 그리스도의 성육신, 마라나 타!(주여, 어서 오소서!) - 성경의 마지막 구절
  •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 - 그리스도의 자기비움, 신성비움

우리신화의 중간계: 통과의례, 불교(수평), 바리데기 신화
판타지 속 중간계(Middle Earth)

1-1) 중간계-여성적 건축, 수평적 건축



  • 미완과 즉흥성 중심 (vs 완결과 계획성 feat. 남성적 가치관)
  • 덩이 식물처럼 수평으로 계속 자라남, 선을 그리면서 ‘덩이’혹은 ‘매듭’ (일시적 안정화)
  • 덩이, 매듭 부분을 무엇으로 할까? 기존의 완결된, 고정화된 것(남성적, 수직적 목소리, 언어, 개념 등등) 들을 해체하는 제스쳐, 지점이 표현되면 좋겠음, 그것을 해체해서 새로운 무엇으로 만들고 (매듭짓고) 또 다시 이어 나가기
  • 추가로, <푸에블로 인디언의 뱀 의식> 읽으면서 질문, ‘왜 현대는 더 이상 의례와 의식을 하지 않는가?’ - 우리 문제의식과 연결해볼 수 있을까?


(2) 정령의 도구들

    • 정령이 느껴지는, 영성이 깃든 것 같은 오브제, 물건, 도구?
    • 흔적, 자취
    • (1) 소리 (2) 달 (3) 별자리 (3) 물 (4) 돌봄(feat.길고양이, 공유오피스) 
    • 로쿠스 안의 일광, 해와 달의 주기 - 시간성(feat. 창문, 감각인식- ‘해가 떴구나 졌구나 아침이구나 밤이구나 비가 오는구나 첫눈이구나’)

    • ‘도구’란 무엇인가? 딜리네스의 ‘도구론’, 딜리네스만의 정의
    • 도구의 다목적성
    • 애니미즘: 1. 만물에서 영혼을 본다. 2. 영혼의 관계성, 관계적 사고
    •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도구
    • 영과 육

    • 이반 일리치의 도구론: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는 도구. 인터넷, 플랫폼, AI도 도구가 될 수 있다. 
    • 하이데거 도구 철학: 구두라는 사물이 이미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세계는 구두와 같은 도구적 사물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사물이 구두가 되는 것, 즉 도구적 존재가 되는 것은 인간이 구두를 신고 삶을 영위할 때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3) ‘영원’의 장소

    • 죽은 자, 죽음 DEATH
    • 정화의 의식, 영성의 복원 
    • 다른 영혼과의 채널링을 통해서 나의 확장, 온전한 자신에 대한 감각회복 
    • 중간계의 시간성: 영원성/ 시간의 영원성을 감각하게 하기.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소 
    찰나의 접힘, 접힌 장소, 직선적 시간관에서 탈피.
    영원성을 무엇으로 볼것인가? 동시성 
    직선적 시간관 재고: 과거-현재-미래,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의해 늘 재구성된다. 계속해서 살아움직이는, 활성화되는, 고정되지 않는, 늘 살아있는, 살아 움직이는
    오직 현재만 있다. 기억-흔적-선그리기 
    활성화된 시간 


    (4) 로쿠스 기반 작업 리스트

    PART I. 
    가지 - 스투파 - 표면(테이블)
    이 관념적인 이성과 감각적인 경험 사이의 경계로서의 지면은 마치 베이스보드 위에 올려진 미니어처처럼 그 위의 ‘집기’를 탈착 가능한 객체로 만든다. 그러나 실상은 이 지면은 지형이라는 집기를 다 치우고 다시 설치하는 추상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표면이다. 
     
    • 공기(좌), 대기, 기상(atmosphere),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회오리
    • 중간(계) in the middle: 수직세계에서의 중간이 아닌, 사이(안) in between: 경계의 사이가 아닌 
    • 자연(대지)에 스투파를 세우는 방식, 증식, 믿음의 전파, (사리)를 이동, 저장, 기념하는 방식으로 벌어지는 문화 → 스투파, 불족적(믿음의 대상, 주체 없이 흔적으로 섬긴다)

    PART II. 
    물길 - 판화 - 표면(창문)
    • 문자인가, 형상인가, 기호인가, 영혼의 관계성, 미러
    • 조류 - 달이 쓰는 서사

      PART III. 
      황토 - 저부조 - 표면(책장) 
      • 껍질, 스킨, 털가죽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저서 『곰에서 왕으로』에서 북아메리카 고원지대 톰슨 인디언의 야생 염소 신화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일곱 아들로 구성된 사냥꾼 일행은 야생 염소를 잡기 위해 산으로 간다. 그중 막내아들은 여자 야생 염소에 이끌러 이들 무리가 있는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여자 염소가 건네 준 숫염소 털가죽을 입자, 즉시 숫염소가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생 염소 무리들과 생활하며 모든 암염소들과 관계를 가진다. 이제 암염소는 모두 자신의 아내들이며,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모든 새끼 염소들은 자신의 자식이 된다. 나는 인간인 동시에 염소가 되고, 내가 낳은 새끼 염소도 내 자식으로서 곧 인간이다. 그리고 내 자식은 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게 인간은 염소와 친족이 된다. 한 가족, 부족을 이루며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유일하게 사냥할 수 있는 숫염소는 사실상 자신의 처남으로 생존을 위해 죽이지만 자신의 친척이라는 관계성을 놓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만 잡고 살갗을 해체하고 남은 뼈를 땅속에 가지런히 묻는 의식을 치른다.

      • 훌륭한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활이나 총 쏘는 솜씨가 좋은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솜씨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인디언에게 있어 훌륭한 사냥꾼은 일종의 ‘윤리’ 문제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도 동물이 되어 동물사회의 풍습이나 생활을 체험하고, 나아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동물도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디언 사상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인간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인간 역시 동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곰에서 왕으로』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53쪽)

      • 이 신화는 인간과 염소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단지 표면적으로 확인되는 겉모습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그 겉모습도 절대적이지 않다. 산속을 돌아다니던 염소도 자신의 동굴로 들어가 밖에서 걸쳤던 ‘털 가죽’ 하나 벗으면 금세 ‘인간’이 되고, 반대로 사냥하기 위해 산속에 들어간 사냥꾼 인간이 염소 동굴에 함께 들어가 그들의 털옷을 걸치면 곧바로 염소가 된다. 톰슨 인디언들에게 염소와 인간의 사이의 경계는 털가죽 한 장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유연하다.

      •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같은 이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서 훌륭한 사냥꾼의 덕목은 동물을 잡는 유려한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서 만나는 동물이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알고 인간인 그 동물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즉 어떤 ‘윤리’를 고민하며 만들어 가느냐에 있다. 그리고 앞서 확인했듯, 이 윤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앞서 염소 털가죽으로 상징되는 사냥꾼의 신체적 변형은 필수임을 부각시킨다. 톰슨 인디언의 염소 신화는 염소의 생활 풍습, 염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염소 털가죽을 입어 염소의 몸으로 변형 될 때에, 해서 변형된 몸으로 그 무리 속에 들어갈 때 시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PART IV. 
      목조선 - 타임랩스 - 표면(벽) 

      해안, 바다, 물 

      • 다시마 루트: 물, 식물, 여성
      • 기억, 죽음, 신, 영혼
      • 다른 생명체가 ‘기억’하는 방식 
      • ‘뇌’: 기억에 대한 해석, 기억이 활동하는 뇌, ‘기억’이란 무엇일까? 
      • 기억: ‘잊지 않는다/전체 관계망

        • 브로시우스는 페난 족을 가리켜 숲속의 관리인이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숲속의 하계망은 생태 지식과 기억의 원천이 된다. 많은 강이 그 강어귀나 주변에서 풍부히 나는 특정한 나무 이름이나 과실의 이름으로 불린다. 돌의 형태 같은 자연적인 특징에 따라 이름이 붙기도 하며, 코뿔소의 죽음이나 좋아하던 개를 잃은 사건, 또는 특히 과실이 풍부했던 계절의 이름을 딴 것도 있다. 많은 강은 사람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어떤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 또는 강 주변에서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가리킨다. 폐난 족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강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같다.
          (빙하이후, 442)

          숲에 살고 있지만, 이 사람들에게 세상은 영혼, 귀신, 신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애초 별달리 주의하지 않았던 아주 작은 행동에서 점점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은 같은 불에서는 결코 요리하지 않는다. 러복의 생각으로는 상당히 쉽게 잡을 수 있는데도 사슴과 맥이 다니는 길은 무시한다. 어떤 금기가 있어 그런 동물은 잡지 않으며, 어떤 음식은 같이 먹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때 러복은 한 젊은 남자가 나이 든 어른에게 요리를 잘못했다면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았다. 밤이 되자 범죄를 저지를 자는 스스로 자해하여 나온 피를 물에 섞고 하늘로 던졌다. 노한 신을 달래는 행동이다. 러복은 노래와 말하기는 상대방이 아니라 흔히 숲에 대고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때로 나무로 만든 플랫폼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중에 다시 모일 과실나무 가까운 곳에 통나무를 남겨 놓기도 한다.
          (빙하이후, 445)


        윤이야, 우리 ‘프로젝트 명’ 떠올리면서 진행하면 개념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애. 라인스, 걷기, 길, 행려-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계속 나아가면서 맺히고 생성하고. + 그런데 오늘 든 생각 중에 하나는 계속 나아가면서도 돌아온 길을 되돌아 가서 혹은 돌아온 길을 떠올리면서 그 과정에 맺혔던, 생성 했던 무언가를 지금 이 길 위에서 재해석에서 다시 만들어 보는 것들(이전 것의 변용)도 전체 작품 사이에 계속 들어가면 좋겠어. 그래서 전의 것과 지금 것이 연결되도록, 전체적으로 그렇게 구성되면 어떨까.  관객들이 그 부분이 다르게 ‘오버랩’ 된다고 느껴도 좋을 것 같아. 그게 동시성인거고 판화에도 오버랩기법 같은 거 더 잘 드러나게 연결해도 좋을 것 같고.

        재영아, 난 요즘 ‘아나크로니즘’ 세미나에서 듣고 떠올렸는데 비슷한 느낌일 수도. ‘시대착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일부러 시간을 뒤섞어 낯설게 만드는, 갑자기 고대 사물이 등장한다든가 미래시제를 쓴다든가. 방금 은아쌤이랑 대화하다가 〈자기조직하기〉 예전에 나온 이 책에서 '우정'에 관한 에세이 보다 우리 떠올리셨대. 추천주심.

        셀린 콘도렐리의 글 「바라보기에는 너무 가까운, 우정에 관한 소고」에서는 누군가의 동맹이 되고, 어떤 쟁점에 관해 함께 전념하는데 해방적인 잠재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런 힘이 개인으로 존재할 때보다는 공동에게 주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여기에 십분 동의한다. (..) 우정이라는 관계의 상태가 단순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기를 시작하고, 어떤 특정한 목표를 위해 행동하는 것과 연결될 때는 즉각적으로 합의된(혹은 합의되지 않은) 내부의 정치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내부의 정치성은 곧바로 그 내부를 둘러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다.